이시다 미쓰나리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이시다 미쓰나리는 1560년 오미국에서 태어난 센고쿠 시대 무장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섬기며 행정 관료로 활동했다. 그는 히데요시 사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대항하여 세키가하라 전투를 주도했으나 패배하여 처형되었다. 뛰어난 행정 능력에도 불구하고 다른 다이묘들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했으며, 세키가하라 전투에서의 지휘 능력 부족 등으로 인해 패배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이시다씨 - 세키가하라 전투
세키가하라 전투는 1600년 세키가하라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과 이시다 미쓰나리의 서군 간에 벌어진 전투로,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권력 다툼과 가신단 갈등을 배경으로 동군이 승리하여 에도 막부 성립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 이시다씨 - 사와 산성
사와 산성은 가마쿠라 시대에 축성되어 센고쿠 시대와 에도 시대에 중요한 역할을 한 시가현 히코네시의 산성으로, 이시다 미쓰나리가 보수 및 천수각을 건설했으나 세키가하라 전투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함락되었고, 이후 이이 나오쓰구가 히코네성을 축성하면서 폐성되어 현재는 유적과 유원으로 남아있다. - 1560년 출생 - 안니발레 카라치
안니발레 카라치는 이탈리아의 화가로, 형제, 사촌과 함께 볼로냐에서 화실을 열어 인체 드로잉을 기반으로 미술 교육을 시작했으며, 라파엘로와 베네치아 화가들의 영향을 받아 절충적인 화풍으로 파르네세 궁전 천장화를 제작하여 바로크 회화 발전에 기여했다. - 1560년 출생 - 고토 모토쓰구
고토 모토쓰구는 전국 시대 말기부터 에도 시대 초기에 활약한 무장으로, 구로다 나가마사를 섬기다 출분 후 오사카 전투에서 오사카 5인중으로 활약했으며 도묘지 전투에서 전사, 용맹함과 지략으로 이름을 떨쳤다. - 1600년 사망 - 조르다노 브루노
조르다노 브루노는 16세기 이탈리아 철학자, 수학자, 점성술사, 시인으로서, 혁신적인 무한 우주론과 다원 우주론을 주장하다 가톨릭교회로부터 이단으로 규정되어 화형당했으나, 그의 사상은 후대에 큰 영향을 미치며 사상의 자유의 상징이 되었다. - 1600년 사망 - 안코쿠지 에케이
안코쿠지 에케이는 아키 다케다씨 출신으로 모리 씨의 외교를 담당하며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급부상을 예측하고 귀순을 중재, 이요 국에서 6만 석의 영지를 받았으나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에 가담하여 처형당한 승려이자 정치적 수완가이다.
이시다 미쓰나리 | |
---|---|
기본 정보 | |
![]() | |
이름 | 이시다 미쓰나리 |
본명 | 사키치 (佐吉) |
다른 이름 | 미쓰나리(三成), 미쓰야(三也) |
관위 | 종5위하 지부소유 |
계명 | 강동원정축인공대선정문(江東院正軸因公大禅定門) |
출생지 | 오미국(현 시가현나가하마시) |
사망지 | 교토 |
출생일 | 1559년 |
사망일 | 1600년 11월 6일 |
묘소 | 교토 다이토쿠지 산겐인 고야산 오쿠노인 시가현 히코네시 사와야마 유원지 내 교토 묘신지 내 수성원 |
아버지 | 이시다 마사쓰구 |
어머니 | 미상 (이와타 씨, 즈이가쿠인) |
형제 | 야지로 마사즈미 이시다 미쓰나리 후쿠하라 나가타카 정실 |
배우자 | 고게쓰인(우다 요리타다의 딸) |
자녀 | 이시다 시게이에 이시다 시게나리 사키치(세이유) 야마다 하야토의 정실 고이시 도노(오카 시게마사의 아내) 다쓰히메 (쓰가루 노부히라의 측실) 하치로 기타 2명의 딸 (최소) |
직위 및 소속 | |
관직 | 부교(奉行), 다이묘(大名) |
소속 | 아자이 씨(浅井氏) 도요토미 씨(豊臣氏) 서군(西軍) |
주군 | 도요토미 히데요시 → 도요토미 히데요리 |
영지 | 사와야마 성(佐和山城) 다이묘 |
사와야마 성주 임기 시작 | 1590년 |
사와야마 성주 임기 종료 | 1600년 |
사와야마 성 후임 | 이이 나오마사 |
가문 | 간무 헤이시(桓武平氏) 미우라 씨(三浦氏) 지류 아시나 씨(蘆名氏) 방계 이시다 씨(石田氏)? |
군사 활동 | |
주요 전투 | 돗토리성 공방전 다카마쓰성 공방전 시즈가타케 전투 고마키·나가쿠테 전투 오시성 공방전 일본의 조선 침략 (1592-1598) 후시미성 공방전 세키가하라 전투 |
기타 정보 | |
문장 | [[파일:Japanese Crest mitumori Kikkou ni Hanabishi.svg|15px]] 아자이 씨 [[파일:Goshichi_no_kiri_inverted.svg|15px]] 도요토미 씨 [[파일:大一大万大吉.svg|15px]] 서군 |
2. 생애
이시다 미쓰나리는 1559년 오미국(현재의 시가현 나가하마시) 북부에서 아자이 씨 가신 이시다 마사쓰구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이름은 사키치였다. 1573년 오다니성 전투에서 아자이 씨가 패배한 후 이시다 가는 봉직에서 물러났다. 전설에 따르면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섬기기 전 불교 사찰의 승려였다고 하나, 이 전설은 에도 시대에 와서야 등장한 것이라 그 정확성은 의심스럽다.
1577년, 미쓰나리는 나가하마의 다이묘였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만났고, 이후 히데요시의 무사가 되었다. 히데요시가 주고쿠 지방에서 원정을 벌였을 때, 돗토리성과 다카마쓰성(현 오카야마현) 등의 성 공격을 지원했다.
1583년 시즈가타케 전투에서 시바타 가쓰이에 군의 정찰 임무를 맡았고, 최전방에서 적병에게 창을 꽂은 첫 번째 용사로서 큰 공을 세웠다. 1584년 고마키·나가쿠테 전투에 참전했고, 같은 해 오미국 가모 군의 검지(토지 측량) 관리로 일했다.
1585년, 형 이시다 마사즈미와 함께 사카이(현 오사카부 사카이시)의 관리로 임명되었고, 아사노 나가마사, 마에다 겐이, 마시타 나가모리, 나쓰카 마사이에와 함께 히데요시 정부의 오봉행 중 한 명이 되었다. 히데요시는 그에게 오미국 사와야마성(현 히코네시 일부) 50만 석 영지를 주는 다이묘로 임명했다. 사와야마 성은 당시 최고의 요새 중 하나로 알려져 있었다. 1586년 1월, 지혜와 용기로 유명한 시마 사콘을 고용했다.
1588년, 비무장 민중의 무장 해제와 평화 유지를 위해 히데요시가 실시한 "검 수색"을 담당했다. 1590년 후호조 씨 정벌에서 오시성 공격을 지휘하여 함락시켰다.[2][1] 1592년, 마시타 나가모리, 아사노 나가마사와 함께 3대 관료 중 한 명으로 임진왜란에 참전했다.[2]
1597년,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기리시탄(천주교 신자)을 박해했으나, 체포된 기리시탄의 수를 최소화하고 히데요시의 분노를 가라앉히려 노력하는 등 기리시탄에 대한 동정심을 보였다(일본 26성인 참조). 같은 해 한국과 중국과의 전쟁 종식을 위해 노력했다고 전해진다.[3]
2. 1. 출세
에이로쿠 3년(1560년) 이시다 마사쓰구의 차남 또는 3남으로 오미국 사카타군 이시다 촌(현 시가현 나가하마시 이시다 정)에서 태어났으며, 아명은 사키치이다. 이시다 가문은 이 지역의 토호세력으로 추정된다.하시바 히데요시가 오다 노부나가 슬하에서 오미 북부의 아자이 가문을 멸문한 후, 이 지역 영주로 부임해 나가하마성을 쌓아 지배를 공고히 하였다. 이 무렵인 덴쇼 2년(1574년) 히데요시의 고쇼(小姓)로 일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히데요시가 오다 노부나가의 명으로 주고쿠 지방을 공략할 때 종군했으며, 덴쇼 10년(1582년) 혼노지의 변으로 노부나가가 횡사하자, 히데요시를 보좌하여 아케치 미쓰히데를 토벌한다.
덴쇼 11년(1583년) 시즈가타케 전투에서 시바타 가쓰이에 군의 동향을 정탐하고, 선봉에 나서 공을 세운 기록이 《일류가기》(一柳家記)에 적혀 있다. 덴쇼 12년(1584년) 고마키·나가쿠테 전투에 종군했으며, 같은 해 오미국 가모군에서 행정실무를 보았다. 하시바 히데요시가 중앙 정계를 장악하면서 미쓰나리도 히데요시의 측근으로 대두되기 시작한다.
덴쇼 13년(1585년) 7월 11일, 히데요시의 관백 취임에 따라 종오위하 치부소부에 서임되었다. 같은 해, 시즈가타케 칠본창이 4000~6000석의 가증을 받은 것에 비해, 히데요시로부터 오미국 미즈구치 4만 석의 성주로 봉해졌다고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지만, 최근 연구에서는 미즈구치성은 나카무라 카즈우지가 축성했으며, 미쓰나리가 영유한 사실은 없다고 여겨지고 있다.
덴쇼 14년(1586년) 1월, 시마 키요오키(사콘)에게 지행의 절반을 주고 불렀다고 전해진다(『죠잔기담』). 히데요시는 이에 놀라 칭찬하며 사콘에게 미쓰나리에 대한 충성을 촉구하고 국화 桐 문장이 들어간 하오리를 주었다. 같은 해, 에치고국의 우에스기 가게카쓰가 히데요시에게 신종을 맹세하기 위해 상락해 왔을 때, 이를 주선하였다.
사카이 부교에 임명된 미쓰나리는 사카이를 완전히 종속시켜 병참 기지로 정비하였다. 덴쇼 15년(1587년) 규슈 평정이 비교적 단기간에 끝난 것은 수군을 최대한 활용하여 대군을 동원·수송하는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며, 이러한 히데요시의 원정을 지원한 것은 후방의 병량·무기 등의 수송을 담당한 미쓰나리 등 유능한 이료들이었다.
규슈 평정 후, 하카타 부교를 명령받고, 군감 구로다 다카타카 등과 함께 하카타 마을 나누기, 부흥에 종사하였다. 덴쇼 16년(1588년) 취차로서 사쓰마국 시마즈 요시히사의 히데요시에 대한 알현을 주선하였다.
덴쇼 17년(1589년) 미노국을 검지하였다. 덴쇼 18년(1590년) 오다와라 정벌에 참진하여 후호조씨의 지성인 다테바야시성, 시노성 공격을 명령받았다. 시노성 공격에서는 모토아라가와강의 물을 성 주변에 끌어들이는 수공이 행해졌고, 그 당시 유구가 이시다 제방으로서 주변에 현존하고 있다.[20] 오다와라성 개성 후 7월 초순까지 전투가 계속되었다. 미쓰나리는 히타치국 사타케 요시노부가 히데요시에 알현하는 것을 주선하고, 오슈 시치 후 오슈에서의 검지 부교를 역임하는 등 이료로서 큰 공적을 세웠다.
덴쇼 19년(1591년) 4월, 오미 사와야마에 입성한다. 다만, 이는 창입지의 대관 자격으로 들어간 것으로, 성을 맡는 성대로서의 입성이었다. 당시 미쓰나리의 소령은 미노국 내, 안파군고베와 그 주변에 있었다고 추정되고 있다.[21]
분로쿠 원년(1592년)부터 분로쿠의 역(조선 출병)에서는 도해하여, 마스다 나가시게, 오타니 요시츠구와 함께 한성에 주류하여 조선 출병의 총봉행을 역임한다. 분로쿠 2년(1593년) 벽제관 전투, 행주산성 전투에 참가한다. 명군의 강화사 사용지, 서일관을 따라 히젠나고야성으로 돌아오는 등, 명과의 강화교섭에 적극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히데요시와 현지의 연락역이라는 입장의 행동은, 도요토미 가중에서 후쿠시마 마사노리, 구로다 나가마사 등 무단파의 반발을 불렀다.
분로쿠 3년(1594년) 9월 3일, 어머니 즈이가쿠인이 사망하자, 사와야마성 아래에 즈이가쿠지를 건립하였다. 이 해에 시마즈씨, 사타케씨의 영국을 봉행으로서 검지한다.
분로쿠 4년(1595년), 히데요시의 명령에 따라, 히데요시의 조카 도요토미 히데쓰구를 모반 혐의로 질문한다(히데쓰구 사건). 히데쓰구의 사후, 그 구령 중 오미 7만 석이 미쓰나리의 대관지가 된다. 같은 해, 오미 사와야마 19만 4,000석의 소령을 히데요시로부터 받고,[23] 정식으로 사와야마성주가 되었다.[21]
게이초 원년(1596년), 사와야마 영내에 13개조 옥서, 9개조 옥서를 낸다. 명의 강화 사절을 접대한다. 같은 해, 교토 부교에 임명되어,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키리시탄 탄압을 명령받았으나, 이때 잡는 키리시탄의 수를 최대한 줄이거나, 히데요시의 노여움을 달래 신도들이 처형되지 않도록 분주하는 등의 정의를 보였다고 한다(일본 26성인).
게이초 2년(1597년) 게이쵸의 역이 시작되면 국내에서 후방 지원에 활약하였다. 울산성 전투 때 조선에 있던 여러 장수에 의해 전선 축소가 제안되고, 이에 격노한 히데요시에 의해 제안에 참가한 다이묘가 견책이나 소령의 일부 몰수 등의 처분을 받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때, 현지에서 상황을 보고한 군목부는 미쓰나리의 인척인 후쿠하라 나가타카 등이며, 처분을 받은 구로다 나가마사, 하치스카 이에마사 등은 이 처분을 히데요시에게 미쓰나리·나가타카가 참언한 결과라고 여겨 대립 관계가 되는 계기가 되었다.[24] 가토 기요마사는 이시다 미쓰나리에게 귀국하지 않는 것을 히데요시에게 보고되고, 무단파와의 대립이 깊어졌다고 전해지고 있다.
게이초 3년(1598년), 히데요시는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의 영지였던 지쿠고국, 지쿠젠국에 미쓰나리를 가증이봉하려고 하였지만, 미쓰나리는 사퇴하였다. 그러나, 히데요시의 직할지가 된 지쿠고국·지쿠젠국의 창입지의 대관에 임명되어 나가시마성을 받고 사실상 지배하였다.
2. 2. 도요토미 정권 하에서
덴쇼 13년(1585년) 음력 7월 11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관백에 취임하자 미쓰나리도 종오위하 지부노소유에 서임되었고, 연말에는 오미국 미나쿠치 4만 석에 배령되었다.[64]덴쇼 14년(1586년) 음력 1월, 무용으로 명성이 높았던 옛 쓰쓰이 가문의 가신 시마 기요오키를 자신의 영지 절반인 2만 석에 가신으로 맞이한다. 히데요시는 이에 놀라 미쓰나리의 행동을 칭찬했고, 시마 사콘에게는 미쓰나리에게 충성을 보일 것을 재촉하며 국동문양이 있는 하오리를 주었다.[64] 다만, 시마 사콘을 가신으로 맞이한 시기와 관련해서는 여러 설이 존재한다. 같은 해, 에치고의 우에스기 가게카쓰가 오사카성에 상경하여 신종을 맹세할 때 이를 알선했으며, 사카이의 행정 실무도 담당했다.
덴쇼 15년(1587년) 규슈 정벌에서 후방 보급을 맡았다. 전년의 시코쿠 정벌처럼 규슈 평정이 비교적 단기간에 끝난 것은 미쓰나리의 유능한 행정 실무 덕분이라는 견해가 있다. 규슈 평정 후에는 하카타의 행정 실무를 담당하여 부흥에 힘썼다.
덴쇼 16년(1588년), 사쓰마의 시마즈 요시히사와 히데요시의 접견을 주선했다.
덴쇼 17년(1589년) 미노국 검지 실무를 맡았고, 이듬해 덴쇼 18년(1590년) 오다와라 정벌에서는 호조 가문 주변 지성 공략에 매진했다. 오시성 공격에서는 성 주변 강물을 끌어들이는 수공을 시도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현재 오시 성에는 그가 진두지휘했다는 이시다 제방이 남아있다. 오시 성은 본성인 오다와라성 함락 후 개성되었기 때문에, 미쓰나리의 책략이 부족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히타치의 사타케 요시노부가 히데요시를 알현하도록 주선하고, 오슈 검지 관련 실무를 담당하는 등 행정 실무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분로쿠 원년(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마시타 나가모리, 오타니 요시쓰구와 함께 조선에 건너가 평양성에서 행정 총책임을 맡았다. 그는 평양 전투 이후 북진했다가 추위, 보급 차단, 의병 활동으로 평양성에 돌아와 행정 총책임을 맡게 된 것이었다.
분로쿠 2년(1593년), 벽제관 전투에서 경기도 고양시 지역에 매복, 조명 연합군을 격파했다. 그러나 이시다 미쓰나리와 우키타 히데이에 등이 이끄는 일본군은 행주산성 전투에서 조선군에 패배했다. 미쓰나리는 제2대를 맡아 마에노 나가야스, 마시타 나가모리, 오타니 요시쓰구와 함께 싸웠으나 패했고, 조선군이 쏜 승자총통에 맞아 부상까지 당했다.
당시 행주산성은 좁은 입구와 뒤편 한강이라는 지형적 특성을 지녔는데, 미쓰나리와 우키타 히데이에는 좁은 입구에 병력을 밀어넣는 무리수를 두었다.
이후 명나라 강화사 사용재와 서일관을 맞이해 나고야성으로 돌아갔다. 명과의 강화 교섭을 적극 중재했지만, 후쿠시마 마사노리, 가토 기요마사 등 무단파의 반발을 샀다.
분로쿠 3년(1594년), 사쓰마 시마즈 가문과 히타치 사타케 가문 영내 검지를 담당했다.
분로쿠 4년(1595년), 히데요시의 조카 도요토미 히데쓰구가 모반 혐의로 모살되자, 그의 영지 중 오미 7만 석과 사와야마 19만여 석을 하사받았다.
게이초 원년(1596년), 사와야마 영내에 규정서를 내리고 명의 강화 사절을 접견했다. 교토 행정 실무를 담당했으며, 히데요시의 기리시탄 탄압령에도 기리시탄을 적극 변호했다.
게이초 2년(1597년) 정유재란 발발 후, 명과 조선과의 강화 교섭에 힘썼지만 결렬되었다.
게이초 3년(1598년) 8월, 히데요시 사망 후 조선 주둔 일본군 철수에 힘썼다.
2. 3. 히데요시 사후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도요토미 정권을 승계했다. 히데요시는 임종 직전, 마에다 도시이에를 포함한 오대로[65]에게 자신의 어린 아들 히데요리의 보좌를 간절하게 부탁하였다. 그러나 오대로의 한 명인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히데요시가 죽자 야심을 드러내며 자신의 천하를 계획하기 시작했다.1598년(게이초 3년), 미쓰나리는 이에야스에 대항했지만, 가신 시마 기요오키의 이에야스 암살 계획은 대의명분을 중요시하여 거절하였다. 나쓰카 마사이에와 함께 독단적으로 이에야스 암살을 시도했지만 실패하였다.[66]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가문의 무장들을 포섭하고자 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사혼을 엄격히 금지했지만, 이에야스는 이를 어기고 후쿠시마 마사노리, 가토 기요마사, 구로다 나가마사 등과 도요토미 가문의 허가 없이 사돈을 맺었다.
1599년(게이초 4년) 음력 1월, 미쓰나리는 이에야스를 히데요시가 제정한 법을 어겼다며 마에다 도시이에에게 제소하고, 이에야스에게는 죄를 추궁하기 위해 사자를 파견하였다. 이로 인해 다이묘들은 양분되어 마에다 도시이에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저택으로 각각 집결하는 사태가 발생하였고, 양측은 전쟁 일촉즉발의 상황에 이르렀다. 이에 이에야스는 음력 2월 2일 도시이에와 미쓰나리와의 각서를 교환해 화친하였다. 그러나 윤 3월 3일 마에다 도시이에가 병사하자, 미쓰나리와 대립하고 있던 가토 기요마사, 가토 요시아키, 구로다 나가마사, 이케다 데루마사, 아사노 요시나가, 호소카와 다다오키, 후쿠시마 마사노리의 7무장이 미쓰나리의 오사카 저택을 습격한다. 하지만 미쓰나리는 사전에 사타케 요시노부의 도움을 받아 오사카를 탈출해 후시미성으로 도주한 후였다.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중재로 화해하고, 미쓰나리는 오봉행에서 물러난다. 음력 3월 10일 미쓰나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차남 유키 히데야스의 경호를 받으며 사와 산성으로 돌아갔다.
마에다 도시이에가 죽은 후, 이에야스는 마에다 도시나가에게 모반 혐의를 씌워 가가 정벌을 계획하였으나, 도시나가는 어머니인 호슌인을 인질로 보내어 이에야스에게 순종하였다. 이에 미쓰나리는 사와 산성에서 이에야스 제거를 결심하였다.

2. 4. 세키가하라 전투
게이초 5년(1600년) 음력 7월, 미쓰나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정계에서 배제하기 위해 아이즈(현재의 후쿠시마현)의 대 다이묘 우에스기 가게카쓰, 그의 가신 나오에 가네쓰구와 비밀리에 거병 계획을 꾸몄다. 이에 관해서는 애초에 밀약 같은 것은 없었다는 설도 있다. 이후, 우에스기 가문은 공공연히 이에야스와 대립하였고 가네쓰구는 나오에장을 전국에 반포하여 도쿠가와에 반기를 표하였고, 이에 이에야스는 여러 다이묘를 이끌고 아이즈 정벌을 단행한다. 지금이 동서로 이에야스를 협공할 좋은 기회로 본 미쓰나리는 거병을 결의하고, 이에야스에게 종군하려던 친우 오타니 요시쓰구를 우군으로 맞이하였다. 요시쓰구는 당시 영지 19만 석에 불과한 미쓰나리가 250여만 석의 대 다이묘인 이에야스에게 대항하는 것은 무모하다며 말렸지만, 도요토미 가문을 위한 미쓰나리의 의지를 꺾을 수 없어 미쓰나리의 서군에 가담한다.음력 7월 12일, 미쓰나리는 형 마사즈미를 부교로 하여 오미 에치강 인근에 관소를 설치하고, 이에야스를 따라 아이즈로 향하는 후발 다이묘 나베시마 가쓰시게와 마에다 모리카쓰의 움직임을 저지하여 자군에 편입시켰다. 단, 나베시마 가쓰시게의 경우, 아버지 나베시마 나오시게로부터 오사카 저택에 머물러 있으라는 명을 받고, 이를 수상히 여기지만, 아버지의 뜻에 따라 미쓰나리를 따랐다는 설도 있다. 음력 7월 13일, 미쓰나리는 힘으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이기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여러 다이묘의 처자를 인질로 삼기 위해 오사카성 안으로 군을 파견한다. 이때 가토 기요마사의 처를 비롯한 일부는 이미 오사카를 탈출하였고, 호소카와 다다오키의 처 가라샤는 저택에 불을 놓고 죽는다. 이에 다이묘들의 처를 인질로 삼으려는 계획은 중지되었다. 이시다 미쓰나리의 이러한 행동은 일본 전체를 분노에 휩싸이게 했으며, 특히 호소카와 다다오키는 이시다 미쓰나리를 찢어 죽여버리기로 굳게 맹세했다.
음력 7월 17일, 모리 데루모토를 서군 총대장에 옹립해 오사카 성에 입성한다. 이는 오타니 요시쓰구가 이시다 미쓰나리의 인망이 높지 않음을 직언하여 보다 큰 다이묘에게 지휘권을 넘기라는 조언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에야스 역시 미쓰나리와 같이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요리를 위한 것이라고 했기에, 전쟁의 중요한 열쇠를 쥐고 있는 히데요리의 참전을 이끌지는 못했다. 음력 7월 18일, 서군은 이에야스의 중신 도리이 모토타다가 지키는 후시미 성을 공략한다. 그러나 도리이 군의 완강한 저항에 쉽게 함락하지 못하자, 병사들의 가족을 인질로 협박하였고, 음력 8월 1일 협박에 못이긴 병사들의 배신으로 성은 함락된다. 음력 8월 2일, 미쓰나리는 후시미 성 함락을 여러 다이묘에게 알리기 위해 모리 데루모토, 우키타 히데이에 및 자신이 연판장에 이름을 올려 전국에 공포한다.
8월부터 이세 방면을 공략하지만, 예상보다 동군의 서상이 빨랐기 때문에 미쓰나리는 세키가하라에서 야전할 것을 결정한다. 그리하여 음력 9월 15일, 패권을 둘러싼 세키가하라 전투가 시작되었다.
본 전투가 일어나기 전, 동군은 우에스기 가게카쓰를 견제하기 위해 따로 떨어져 있는 다테 마사무네, 모가미 요시아키 등과 나카센도를 경유해 합류하기로 한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3만 8천의 부대가 우에다[67]의 사나다 마사유키 군에 묶여[68] 본전에 참전하지 못하는 병력적 손실이 있었다. 하지만 이에 못지않게 서군 또한 일부 전력이 오쓰, 다나베 등에 분산되었고, 세키가하라에 있는 다이묘들마저도 몇몇이 본전 중 관망하는 태도를 일삼거나, 심지어는 동군과 내통하였다.
전투는 후쿠시마 마사노리 부대의 제지 명령을 무시하고 이이 나오마사 부대가 우키타 히데이에 군에 발포한 것을 시작으로 전개되었다. 전투 초반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수적 우위에 있던 우키타 히데이에 군을 공격했으나, 도요토미 가문을 위한 성전이라 믿는 우키타 히데이에 군의 높은 전의와 우키타 부대의 전위에 있던 아카시 다케노리의 8천 부대의 총공격에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궤멸 위기에까지 몰리게 된다. 우키타 군의 추격은 동군 진영에 있던 가토 요시아키 군과 쓰쓰이 사다쓰구 군이 후쿠시마 군을 원조하여 멈추었으며, 게다가 서군 측은 우키타 군을 제외하고는 크게 움직이지 않았기에 우키타 군은 깊이 추격하지 않고 군대를 정리하였다.
오타니 요시쓰구는 도도 다카토라, 교고쿠 다카토모, 데라자와 히로타카 부대를 맞이하여 일진일퇴의 격전을 치르고 있었으며, 고니시 유키나가는 오다 나가마스, 후루타 시게카쓰 군과 전투를 수행하고 있었다. 시마즈 요시히로 부대는 진격해온 이이 나오마사 군을 맞았으나 격렬하게 응전하지 않은 채 진(陳) 안에서만 응전할 뿐이었다.
한편 서군에서 전의가 가장 높았던 이시다 미쓰나리의 부대에는 호소카와 다다오키, 구로다 나가마사, 다나카 요시마사 등이 공격을 감행하였다. 또한 후쿠시마 마사노리를 구원하고 방향을 바꾼 가토 요시아키의 부대 역시 미쓰나리의 부대를 함께 공격하여, 미쓰나리는 배 이상의 적에게 공격을 받았다. 동군의 각 다이묘들은 사실상 서군의 대장이라 할 수 있는 미쓰나리의 진영으로 쇄도하여 전쟁의 최대 공훈을 세우려 하였으나, 미쓰나리 부대는 이들을 맞이하여 싸웠으며, 오히려 시마 사콘, 가모 사토이에와 같은 장수들의 분전으로 인해, 공격해온 적을 격퇴하여 전투 초반의 전세를 서군에 유리하게 이끌었다.
정오가 가까워지도록 전황은 여전히 서군이 우세했다. 양군 모두 20~30% 정도만 싸우고 있었다. 이 전투 초반의 전황은 동군에게 불리하였고, 내통을 약속한 부대들도 관망하였으므로, 초조해진 이에야스는 본진을 모모쿠바리 산(桃配山)에서 이시다 군과 시마즈 군과의 500미터 거리 지점[69]으로 진을 전진시켜 전장으로 나왔다. 하지만 좀처럼 전황이 바뀌지 않자, 내통을 약속한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군이 진을 치고 있던 마쓰오 산에 포격을 감행하였다. 이후 1만 5천의 고바야카와 군은 서군을 배신하여 산을 내려왔으나,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의 배신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오타니 요시쓰구는 400명의 직속 부대로 반격을 감행하였다. 그는 고바야카와 군의 1진과 2진을 격퇴하였고, 고바야카와의 대군을 300미터 정도 후퇴시키며 분전하였으나[70], 자신의 지휘 아래 두었던 와키자카 야스하루 등의 부대가 고바야카와의 부대에 호응하여 마쓰오 산을 내려오자, 중과부적으로 궤멸하였다.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의 배신으로 전황이 급속히 바뀌어 동군이 우세하게 되었고, 오타니 요시쓰구를 비롯하여 우키타 히데이에의 부대와 이시다 미쓰나리의 부대도 패주했다. 이렇게 해서 일본 전체의 명운이 걸렸던 세키가하라 전투는 단 하루 만에 막을 내렸다.
세키가하라에서 패전한 미쓰나리는 이부키 산으로 도주해 이부키 산 동쪽의 아이가와 산을 넘어 가스가 촌으로 달아났다. 이때 다급하게 도망을 다닌 탓에 밥을 지을 시간마저 확보를 못한 이시다 미쓰나리는 껍질을 벗기지 않은 생쌀을 먹었기 때문에 설사를 심하게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 후, 가스가 촌에서 신호 고개를 우회해 아네가와 강으로 나갔다. 마가타니에서 나나마와리 고개를 넘어 아사노타니로 들어선다, 그리고, 오다니 산의 다니구치에서 다카토키 강 상류로 나와 후루바시로 도주했다. 그러나, 음력 9월 21일 다나카 요시마사의 추격대에 의해 포박되었다.
한편 음력 9월 18일, 미쓰나리의 거성 사와 산성은 동군의 공격을 받고 함락되었다. 이때 부친을 비롯하여 이시다 일족 다수가 전사했다고 한다.
음력 9월 22일 오쓰 성으로 호송되어 성문 앞에 밧줄로 묶어 앉혀 놓았으며, 그 후 이에야스와 회견하였다. 음력 9월 27일 오사카로 호송되어 29일 교토로 호송되어 오쿠다이라 노부마사 감독하에 있게 된다.
음력 10월 1일,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명에 의해 로쿠조가와라에서 고니시 유키나가, 안코쿠지 에케이 등과 함께 조리돌림을 당한 후 참수되었다. 그의 나이 향년 39세였다. 목은 산조가와라에 효수된 후, 생전 친분이 있었던 승려 슌오쿠 소엔, 다쿠안 소호에게 인도되어 교토 다이토쿠지에서 장례를 치렀다.
이시다 미쓰나리는 인간성과는 별개로 자신에게 지나치게 과분한 임무를 수행한 탓에 서군을 패하게 하였으며 본인 역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처형당했다. 이시다 미쓰나리는 문관으로서는 뛰어날지 몰라도 무관으로서는 완전히 실격인 인물로 군사에 대해 완전히 문외한이었으며, 실제로도 행주대첩에서 권율에게 3~4배나 많은 병력을 동원하고서도 반쯤 전멸하는 대패를 당했다. 이 때문에 이시다 미쓰나리는 본인에 대해서 잘 알고 전투 지휘를 본인보다 훨씬 뛰어난 고니시 유키나가 같은 다이묘에게 위임했어야만 했으나, 자신의 분수를 모르고 본인의 그 부족한 군재를 느끼지 못해 본인이 직접 전투 지휘를 하는 바람에 동군에 의해 큰 패배를 당했다. 특히 부하 관리가 매우 엉망이어서 시마즈 요시히로와는 전투 내내 반목했으며, 고바야카와 히데아키를 시작으로 휘하 다이묘들이 와키자카 야스하루 등을 포함해 줄줄이 배신하는 바람에 제대로 힘조차 못 써보고 패배했다.
3. 인물 및 일화
이시다 미쓰나리는 뛰어난 행정 관료였지만, 타협을 모르는 성격과 오만한 태도로 많은 적을 만들었다. 다음은 이시다 미쓰나리와 관련된 일화들이다.
- 세 잔의 차: 하시바 히데요시(후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매사냥을 하다 목이 말라 절에 들렀을 때, 미쓰나리가 처음에는 미지근한 차를 큰 잔에, 다음에는 약간 뜨거운 차를 조금 작은 잔에, 마지막으로 뜨거운 차를 작은 잔에 내왔다. 히데요시는 미쓰나리의 세심함에 감탄하여 그를 가신으로 삼았다는 일화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에도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39]
- 오타니 요시쓰구와의 우정: 한센병을 앓던 오타니 요시쓰구가 찻잔에 농을 떨어뜨렸는데, 다른 사람들은 꺼렸지만 미쓰나리는 아무렇지 않게 그 차를 마셨다. 이 일로 두 사람은 깊은 우정을 맺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일화 역시 근거가 불분명하며, 메이지 시대에는 히데요시가 차를 마셨다는 이야기로 기록되어 있다.[40]
- 세키가하라 전투 패배 후: 미쓰나리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배한 후 자신의 영지에 숨어 지내다 농부의 밀고로 체포되었다. 처형되기 전, 옥졸들이 곶감을 주자 "감은 몸에 좋지 않다"며 거절했다. 옥졸들이 어차피 죽을 텐데 신경 쓸 필요가 있냐고 묻자, 미쓰나리는 "큰 뜻을 이루려는 자는 죽는 순간까지 포기하지 않는다"라고 답했다.
- 가토 기요마사와의 관계: 견원지간으로 알려진 가토 기요마사와는 임진왜란 이전에는 사이가 좋았다고 한다. 히젠 나고야 성 축성 당시 미쓰나리가 후방 지원을, 기요마사가 건설 지휘를 맡아 협력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고니시 유키나가가 먼저 한양에 도착했음에도 가토 기요마사가 먼저 장계를 올린 일로 인해 둘의 사이가 틀어졌다.
- 도쿠가와 이에야스와의 관계: 미쓰나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제거하려 했지만, 정작 가토 기요마사 등에게 습격당했을 때는 이에야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이에야스는 미쓰나리를 보호했지만, 결국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미쓰나리를 제거했다.
- 호소카와 가라샤 사건: 미쓰나리는 호소카와 다다오키를 압박하기 위해 그의 아내 호소카와 가라샤를 인질로 잡으려 했으나, 가라샤가 자결하면서 실패했다. 이 사건으로 호소카와 다다오키는 격분하여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동군에 가담했다.
- 시마즈 요시히로와의 갈등: 임진왜란 때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던 시마즈 요시히로와는 사소한 문제로 자주 다퉜다. 이는 결국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의 패배를 초래한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 오타니 요시쓰구의 충고: 친구인 오타니 요시쓰구는 세키가하라 전투 직전 미쓰나리에게 "재주와 지혜는 뛰어나지만 용기가 부족하고, 인망이 없다"고 충고하며, 다른 사람을 총대장으로 내세우라고 조언했다.[72]
- 사와 산성 함락: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한 동군은 미쓰나리의 거성인 사와 산성을 함락시켰다. 미쓰나리의 저택에는 재물이 거의 없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감사장만 있었다고 한다.
- 행정 능력: 오봉행으로서 미쓰나리의 행정 능력은 뛰어났지만, 그 외의 능력은 부족했다는 평가가 많다. 특히 인간관계에 문제가 많아 주변에 적을 많이 만들었다.
4. 가문의 문장
이시다 가문의 문장에는 '''대일대만대길'''(大一大萬大吉)이라는 말이 적혀 있는데, '한 사람이 모두를 위해, 모두가 한 사람을 위해 노력한다면 천하는 행복해진다'라는 뜻이다.[55] 이는 서양의 '일인은 만인을 위하여, 만인은 일인을 위하여(One For All and All For One)'와 비슷한 말이다.[55] 하지만, 미쓰나리만 이 문장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가마쿠라 시대 무장 이시다 다메히사(미나모토노 요시나카 소속)와 빈고의 야마우치스도 가문도 사용했다.[55] 또, 이시다 가문의 문장에는 구요문과 길경문도 있다.[55]
정확한 정문(定紋)은 알 수 없으나, '대일대만대길'(大一大万大吉) 또는 '대길대일대만'이라는 문장이 아시가루에게 빌려준 갑옷의 몸체나 이시다 미쓰나리의 초상화에 그려진 카미시모에 나타나 있다.[55] 이시다 씨의 문장으로는 구요문이나 도라지꽃문이 사용되었다.[55] '대일대만대길' 문장은 글자 배치나 서체가 불명확하지만, 가마쿠라 시대 무장 이시다 다메히사(미나모토노 요시나카를 쏘아 떨어뜨린 무장)도 사용했으며, 그 밖에 비고국의 야마우치 씨도 사용했다.[55] 미쓰나리의 가문으로 구요문이 거론되기도 한다.[55]
5. 가계
이시다 미쓰나리는 아내와의 사이에서 3남 3녀(혹은 2남 5녀)를 두었다고 전해진다. 미쓰나리의 자손들은 아버지와는 달리 비교적 관용적인 처분을 받았다.
이름 | 설명 |
---|---|
이시다 시게이에 |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목숨을 구명받고 출가하여 하루야 소엔의 제자가 되었다. 104세(또는 103세)까지 장수하였다.[60] 시게이에의 아들은 마쓰다이라 타다나오의 보호를 받았다.[60] |
이시다 시게나리 |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쓰가루 노부타테의 도움으로 키나이를 탈출, 쓰가루 씨에게 숨겨져 스기야마 겐고(杉山源吾)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후 히로사키 번의 가로가 되었고, 자손들은 쓰가루 가문의 가신이 되었다. |
후키도노(吹殿) | 이름은 확실하지 않으나, 이시다 가문의 가신 야마다 카츠시게(하야토노마사)에게 시집갔다. |
코이시노덴(小石殿) | 가모 가의 가신 오카 시게마사의 부인이었다. 아들 오카 키치에몬의 딸은 도쿠가와 이에미쓰의 측실 오후리노카타(지쇼인)이 되어, 이에미쓰의 장녀 치요히메를 낳았다. 치요히메의 혈통은 황실까지 이어져 미쓰나리의 피를 전하고 있다. |
다쓰히메 | 코다이인의 양녀가 되어 히로사키 번 2대 번주 쓰가루 노부아키의 정실이 되었다. 낳은 아이는 3대 번주(쓰가루 노부요시)가 되었다. |
사키치 | 사와야마 성이 함락될 위기에 처했을 때 쓰다 세이유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명받았다. 출가하여 법명을 세이유라고 지었다. |
정실 쿄겟츠인 외에도 측실과의 사이에서 낳은 서출이 있었다는 전승이 있으나, 역사적 사실로 확인되지는 않았다.
6. 관련 작품
다음은 이시다 미쓰나리와 관련된 작품 목록이다.
구분 | 작품명 | 제작 | 방영/개봉 연도 | 배우 |
---|---|---|---|---|
드라마 | 세키가하라 대전투 | 일본 | 2017년 | 오카다 준이치 |
태합기 | NHK | 1965년 | 야나기사와 조지 → 이시자카 코지 | |
봄의 언덕길 | NHK | 1971년 | 나카무라 아츠오 | |
황금의 나날 | NHK | 1978년 | 콘도 마사오미 | |
여자 태합기 | NHK | 1981년 | 에모리 토오루 | |
세키가하라 | TBS | 1981년 | 사카가미 시노부 → 타쿠마 신 | |
히데요시 | NHK | 1996년 | 오구리 슌 → 사나다 히로유키 | |
아오이 도쿠가와 삼대 | NHK | 2000년 | 에모리 토오루 | |
도시이에와 마쓰~가가 백만석 이야기~ | NHK | 2002년 | 하라다 류지 | |
공명의 갈림길 | NHK | 2006년 | 나카무라 하시노스케 (3대) | |
천지인 | NHK | 2009년 | 오구리 슌 | |
고우~공주들의 전국~ | NHK | 2011년 | 하기와라 마사토 | |
군사 간베에 | NHK | 2014년 | 타나카 케이 | |
사나다마루 | NHK | 2016년 | 야마모토 코지 | |
드라마 | 임진왜란 | MBC | 1985년~1986년 | 박광남 |
징비록 | KBS | 2015년 | 강신조 | |
임진왜란 1592 | KBS | 2016년 | 성용원 | |
소설 | 쇼군 | 가네코 노부오(1980년 TV 미니시리즈), 히라 타케히로(2024년, 쇼군[16]) | ||
영화 | 리큐 | 데시가하라 히로시 감독 | 1989년 | |
영화 | 세키가하라 | 2017년 | ||
게임 | 센고쿠 바사라 시리즈 | |||
게임 | 삼국무쌍 시리즈 | |||
게임 | 포켓몬 컨퀘스트 | |||
게임 | 니오 | |||
게임 | 이케멘 센고쿠 | |||
만화 | 외로운 늑대와 새끼 | |||
소설 | 『석다 삼성(石田三成)』, 속편 『가마불(篝火)』 | 오자키 시로 | ||
소설 | 『세키가하라』 | 시바 료타로 | ||
소설 | 『거대한 음모(巨いなる企て)』 | 사카이야 타이치 | ||
소설 | 『석다 삼성(石田三成) "의(義)"에 살았던 지장의 생애(「義」に生きた智将の生涯)』 | 토쿠나가 신이치로 | ||
소설 | 『석다 삼성(石田三成)』 | 도몬 토지 | ||
소설 | 『난세광망 소설·석다 삼성(乱世光芒 小説・石田三成)』 | 시마즈 요시타다 | ||
소설 | 『비장 석다 삼성(悲将 石田三成)』 | 카노 아츠시 | ||
소설 | 『석다 삼성(石田三成) 석천삼성(ソクチョンサムスン)』 | 아라야마 토오루 | ||
소설 | 『석다 삼성(石田三成)』 | 에구치 타카유키 | ||
소설 | 『포박 석다 삼성의 무념과 집념(捕縛 石田三成の無念と執念)』 | 카토 미네오 | ||
소설 | 『삼성의 불가사의한 조조(三成の不思議なる条々)』 | 이와이 사무지 | ||
소설 | 『결전! 세키가하라 석다 삼성편 고랑나리(決戦!関ヶ原 石田三成編 孤狼なり)』 | 하무로 린 | ||
소설 | 『석다 삼성의 청춘(石田三成の青春)』 | 마쓰모토 마사요 | ||
소설 | 『지부의 초석(治部の礎)』 | 요시카와 에이세이 | ||
소설 | 『석다 삼성 가가야마를 경악하게 한 서군의 조직자(石田三成 家康を驚愕させた西軍の組織者)』 | 아이카와 츠카사 | ||
소설 | 『실전 석다 삼성(実伝 石田三成)』 | 히사카 마사시 | ||
소설 | 『사와야마 군기(佐和山軍記)』 | 다테 아키라 | ||
소설 | 『석다 삼성의 아내는 대단해(石田三成の妻は大変)』 | 시게노 나오키 | ||
소설 | 『여덟 번째 창(八本目の槍)』 | 이마무라 쇼고 | ||
소설 | 『네 번째 차(四杯目の茶)』(『전국무장전 서일본편(戦国武将伝 西日本編)』수록) | 이마무라 쇼고 | ||
만화 | 『미츠나리즘(ミツナリズム)』 | 스즈키 코이치 | ||
만화 | 『삼성 씨는 교토를 용서하지 않는다(三成さんは京都を許さない)』 | 사카나 코지 | ||
텔레비전 애니메이션 | 『요괴 군사 위스베(妖怪軍師ウィスベェ)(요괴 워치 코너)(妖怪ウォッチのコーナー)』 | 히노 아키히로 | ||
영화 | 『세키가하라』 | 2017년 | 오카다 준이치 | |
텔레비전 드라마 | 『세키가하라』 | 1981년 | 카토 고 | |
텔레비전 드라마 | 『가가야마와 삼성의 스마호』 | 2023년 | 카라모토 토키오 | |
음악 | 「꿈의 뒤(夢のあと)~석다 삼성(石田三成)」 | 미타 아키라 | 1973년 | |
음악 | 「꿈의 양염(夢陽炎)」 | 사쿠라유키 | 2010년 | |
음악 | 「꿈의 뒤(夢のあとさき)」 | 사쿠라유키(さくらゆき) | 2014년 | |
음악 | 「전국로보『역전평가 석다 삼성(戦国ロボ『逆転評価 石田三成』)」 | 칸케 | 2021년 | |
무대 | 『아름다운 생애 -석다 삼성 영원(とわ)의 사랑과 의(義)-』 | 다카라즈카 가극단·소라구미 | 2011년 | 오오조라 유히 |
참조
[1]
서적
The Samurai Sourcebook
Cassell & Co
1998
[2]
서적
Tokugawa Ieyasu
https://books.google[...]
Bloomsbury
2023-08-00
[3]
웹사이트
井伊直政の「特別扱い」(上)有能で苛烈な忠臣筆頭
https://www.sankei.c[...]
The Sankei Shimbun
2023
[4]
서적
史籍集覧 25改定
https://ndlsearch.nd[...]
近藤出版部
2024-05-23
[5]
서적
石田三成伝
https://www.yoshikaw[...]
吉川弘文館
2024-05-23
[6]
웹사이트
"Ishida Mitsunari Attack Incident" No attack occurred? What happened to the seven warlords who planned it, and Ieyasu?
https://rekishikaido[...]
PHP Online
2023
[7]
학술지
前田利家の死と石田三成襲撃事件
https://cir.nii.ac.j[...]
2013
[8]
학술지
豊臣七将の石田三成襲撃事件―歴史認識形成のメカニズムとその陥穽―
2000
[9]
학술지
徳川家康の人情と決断―三成"隠匿"の顚末とその意義―
2000
[10]
웹사이트
七将に襲撃された石田三成が徳川家康に助けを求めたというのは誤りだった
https://news.yahoo.c[...]
渡邊大門 無断転載を禁じます。 © LY Corporation
2024-06-02
[11]
서적
戦国史の俗説を覆す
柏書房
2016
[12]
서적
歴代文化皇國史大觀
https://books.google[...]
Oriental Cultural Association
2024-05-23
[13]
웹사이트
関ケ原の敗因「準備不足」 石田三成祭で奈良大・外岡教授が講演
https://www.sankei.c[...]
The Sankei Shimbun
2023
[14]
웹사이트
墓から掘り起こされ、調査された石田三成の遺骸
https://news.yahoo.c[...]
2023
[15]
서적
関ヶ原合戦史料集
https://www.kosho.or[...]
新人物往来社
2024-05-22
[16]
웹사이트
Takehiro Hira as Ishido Kazunari
https://www.fxnetwor[...]
FX Networks
2024-04-14
[17]
서적
コンサイス日本人名事典 第5版
三省堂
[18]
서적
関ケ原合戦-戦国の一番長い日-
中央公論社
1982
[19]
서적
総論 石田三成論
戎光祥出版
2018
[20]
보고서
備中高松城水攻め築堤跡 高松城水攻め築堤公園建設に伴う確認調査
http://sitereports.n[...]
2008
[21]
학술지
石田三成佐和山入城の時期について
2003
[22]
서적
佐和山城に就いて
三省堂書店
1912
[23]
서적
戦乱と人物
吉川弘文館
1968
[24]
서적
シリーズ・織豊大名の研究 第二巻 加藤清正
戒光祥出版
2014
[25]
문서
島津家文書
[26]
문서
毛利家文書
[27]
문서
義演准后日記
慶長4年正月29日
[28]
문서
毛利家文書
[29]
문서
慶長3年2月7日付細川忠興宛三奉行連署書状、慶長5年7月晦日付真田昌幸宛三成書状
[30]
학술지
関ヶ原合戦と近世の国制
思文閣出版
[31]
학술지
関ヶ原合戦の再検討ー慶長五年七月十七日前後ー
[32]
학술지
内府(家康)東征の真相と直江状
[33]
학술지
フィクションとしての「問鉄砲」(パート2) : 家康神話創出の一事例(その2)
https://doi.org/10.3[...]
別府大学会
2013-03
[34]
학술지
秀吉独裁の権力構造
[35]
학술지
天正・文禄期の豊臣政権における浅野長吉
[36]
논문
豊臣氏五奉行について:特に発給文書の形式を中心に
大正大学史學會
2007-03
[37]
문서
慶長3年8月5日付徳川家康宛五奉行起請文、8月8日付前田利家宛五奉行起請文、9月3日付五大老五奉行起請文、等(『武家事紀』巻第三十一、所収文書)
[38]
논문
知行充行状にみる豊臣「五大老」の性格
國学院大學
2010
[39]
서적
石田三成の生涯-その-出自と業績-
市立長浜城歴史博物館
1999
[40]
서적
戦国武将の明暗
新潮社
[41]
문서
大日本古文書 浅野家文書 21号文書
[42]
서적
石田三成伝
吉川弘文館
[43]
문서
黒田家文書 -本編 第1巻 204号文書注解
福岡市博物館
1999
[44]
논문
唐入り(文禄の役)における加藤清正の動向
[45]
서적
通俗日本全史
1913
[46]
문서
慶長三年一月十七日付小早川秀秋宛豊臣秀吉朱印状
2016
[47]
논문
豊臣政権下の筑前
1996
[48]
논문
豊臣政権の人質政策の形成過程
戦国史研究会
2006-08
[49]
서적
関ケ原合戦始末記 : 実録天下分け目の決戦
1981
[50]
문서
史籍集覧 第26冊
近藤瓶城
1902
[51]
문서
明良洪範
国書刊行会
1912
[52]
문서
某年10月7日付石田三成自筆書状(「廓坊文書」)
[53]
문서
続史籍集覧 第7冊
近藤瓶城
1930
[54]
뉴스
【戦国こぼれ話】関ヶ原合戦後、無念の最期を迎えた石田三成の気骨あふれる魂の言葉とは(渡邊大門)
https://news.yahoo.c[...]
Yahoo!ニュース
2021-10-18
[55]
서적
石田三成とその一族
新人物往来社
[56]
뉴스
関ヶ原合戦後に斬られた石田三成。その遺骨から判明した衝撃的な事実とは
https://news.yahoo.c[...]
2021-05-15
[57]
전시회
没後四〇〇年特別展覧会 石田三成 ─秀吉を支えた知の参謀─
市立長浜城歴史博物館
1999-10-22
[58]
전시회
文化財保護五〇年記念 特別展覧会 石田三成 第二章 ─戦国を疾走した秀吉奉行─
市立長浜城歴史博物館
2000-10-27
[59]
문서
刀 無銘 正宗(名物 石田正宗)
https://emuseum.nich[...]
東京国立博物館
[60]
웹사이트
武将の末裔が語る“関ヶ原の戦い”裏事情
https://president.jp[...]
[61]
웹사이트
武将の末裔が語る“関ヶ原の戦い”裏事情
https://president.jp[...]
[62]
웹사이트
石田三成×滋賀県 ポータルサイト
https://web.archive.[...]
2018-10-06
[63]
웹사이트
長浜市観光PRキャラクター「三成くん」
http://kitabiwako.jp[...]
2018-10-06
[64]
문서
일본의 전통 예복
[65]
문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오대로 제도
[66]
문서
마사이에의 아이즈 정벌 작전
[67]
문서
우에다 성
[68]
문서
제2차 우에다 성 전투
[69]
문서
진바노(陣馬野) 혹은 쇼기바라
[70]
문서
마쓰노 시게모토의 배신
[71]
문서
외교, 고관의 호적관리 등에 관한 일을 다루었으며, 당시 미쓰나리의 관직명
[72]
서적
石田三成
吉川弘文館
2009-10-01
[73]
문서
히데요시는 이에야스에게 항복을 받기 위해서 이미 다른 남자에게 시집간 여동생 아사히히메를 강제로 이혼 시킨 뒤 이에야스에게 아내로 바쳤으며, 심지어 자신을 낳은 생모인 오만도코로를 이에야스에게 인질로 보냈다. 이에야스를 수하로 넣기 위해서 친 어머니와 여동생을 이에야스에게 바친 것이다. 히데요시가 이에야스를 이렇게까지 큰 인물로 대우한 것은 다 이유가 있는 것인데 미츠나리는 이 사실을 알고도 히데요시가 왜 이렇게까지 이에야스를 우대했는지 깨닫지 못했다.
[74]
문서
심지어 오다 노부나가 생전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보다 더 급이 높았다. 이에야스는 노부나가와 동맹이며 이에야스가 노부나가와 동일한 다이묘였을 당시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의 가신에 불과했다.
[75]
문서
심지어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이를 매우 날카롭게 묘사하는데,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와키자카 야스하루를 유혹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미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시다 미츠나리 측에서 배신할 사람들을 다 골라 놓은 상태였다.
[76]
문서
출신이 오와리라는 설도 있다
[77]
웹사이트
白川亨氏公開質問状
http://www.asahi-net[...]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